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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가 살고 싶어하는
    훈훈한 인심의 마을

    사람내음 가득한두여마을

    신선한 바람내음과 정겨운
    사람내음이 가득한 우리마을

    여산면


    마을역사유래 여산면은 선사시대(구석기)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농역시대에 유용한 숫돌이 많이 나는 산으로 불리었다. 본시 여산군에 속한 곳이다. 여산군은 여량(礪良)과 낭산(朗山)의 두 현을 합쳐 두 지명에서 한자씩 따 붙인 명칭이다. 여량현은 백제 때에는 지량초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여랑으로 바꾸고 덕은군(德恩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더니 고려 현종 9년(1018) 전주에 속했다가 공양왕 3년(1391)에 감무(監務)를 두어서 낭산을 겸임케 하였다.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여랑과 낭산을 병합하여 여산편으로 개칭하고 세종 18년(1436) 원경왕후 민씨의 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고, 숙종 25년(1699) 부로 승격되었다. 고종 32년에 다시 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익산군 여산면이 되어 호산리, 두여리, 대성리는 전의 여산군 천동면으로 원수리, 재남리는 전의 여산군 천서면으로 여산리는 전의 여산군 군내면으로 구성되었다.


    두여리


    1914년 천서면에 속했던 두여리의 전 지역과 천동면의 월곡리, 신기리, 용기리, 금곡리, 군내면의 영전리, 서이면의 마산리, 북삼면의 평촌리, 고행리, 지장리의 일부로써 구성되었다.


    두여마을 지명유래


    금곡(金谷,쇠목)·여단지·개정거리·갱변들·매봉 : ‘여단지’는 자손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과 돌림병에 죽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인 여단이 있었던 곳. ‘개정거리’는 도수장이 있고 개정(보신탕, 개장국)을 팔던 곳. ‘갱변들’은 강변(江邊) 들이다.
    - 용기(龍機·용털·부분명-상·중·하룡)·뙤장고리(뗏장거리): ‘용기’는 본 이름이 ‘용틀’인데 ‘용틀’도 ‘용들’에서 변한 말일 것이다. ‘뗏장거리’는 근처에서 뗏장을 떠 쓰던 곳이다.

    수은(秀恩,들말) : 본 이름은 ‘들말’이고 ‘수은’은 일정 때 홍수로 들말 전체가 유실되어 당시의 면장 김수한씨가 갖은 노력을 기울여 마을을 그 위의 높은 지대로 옮겨주니 동민들이 본 마을 이름을 버리고 면장 이름에서 ‘수’자를 따고 은혜를 입었다 하여 ‘은혜 은’자를 붙여 마을 이름을 삼았다.

    원두(元斗, 두내미, 갱이)·물방아거리 : ‘원두’는 ‘원 두여’의 뜻. ‘두여’의 본 이름은 ‘두내미’인데 그것을 한문자로 ‘斗余(余=남)’로 표기한 것. ‘갱이’는 여산천이 동리 머리로 흐름으로 ‘강’에 접미사 ‘이’를 붙인 것. ‘물방아거리’에는 물방아가 있었다.

    신기(新基, 새터)·오리울 : 새터는 당시에는 새로 생긴 마을. ‘오리울’은 외딴 곳으로 가자면 5리나 되는 곳이라 해서 오리골이라 했다 한다. ‘오리울’의 ‘울’은 ‘오리’가 ‘ㅣ’소리로 끝나니 ‘골→굴’이 ‘울’이 된 것.

    가재(加才,가재골, 가재동) : 골짜기에 가재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 하나 혹 ‘진터’나 ‘갱이’등에서 가직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작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가자골’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진기(陳基, 진터, 갑옷터) : 신라와 백제의 진터였다는 설과 근처 논밭에서 20년 전까지도 돌살촉이 많이 나온 것으로 보아 삼국 이전의 진터였으리라는 추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