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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가 살고 싶어하는
    훈훈한 인심의 마을

    사람내음 가득한두여마을

    신선한 바람내음과 정겨운
    사람내음이 가득한 우리마을

    숲정이성지


    성지1

    이곳 여산 성지는 1868(무진)년 박해 때의 순교성지로 전주 교구 제2의 성지이다. 1866년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으로 시작 된 박해는 1868년에 이르러 가장 치열하였다. 이때 금산, 진산, 고산의 심산 궁곡에 숨어 살던 많은 신자들이 여산 관아에 끌려와 그중 25명이 진리의 증거자로 목숨을 바쳤다.





    옛부터 여산은 충남과 전북을 잇는 호남의 첫 관문이었고 또 깊은 산과 넓은 평야의 분기점에 위치한 까닭에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지역이었다 이런 이유로 천주교 전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빠른 지역이었다 그런가 하면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 또한 길었던 비극의 현장이기도 한다.

    여산은 지금은 보기에 이처럼 초라하고 작은 고을이 되었지만/ 박해 당시에는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오늘의 군부대 사단장급) 있었기 때문에 여산 부사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일정한 형장이 없이 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처형시킬 수 있었다.

    여산은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1868 무진년의 순교성지다. 여산에서 처참한 박해는 1868년 무진년 가을에 벌어졌다. 당시 여산 부의 속읍지였던 금산. 진산. 고산 등지의 심산유곡에 숨어살던 신자들이 여산 관아로 잡혀와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하고 1868 무진년에 처형되어 죽임을 당한 곳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신자들이 숲정이 성지를 비롯/ 동헌과 기금터에서, 옥터와 뒷말 치명터 그리고 배다리에서 순교했다.

    여산에서 대표적인 순교자들은 김성첨 (토마스) 과 그의 일가 5명을 포함하여 고산. 용담. 금산. 진산 등지에서 붙잡혀 온 26명이었다.

    특히 당시 고산 넓은 바위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잡혀와 17명이 처형되었는데 그중에서 지도자인 김성첨(토마스)의 가족은 6명이 순교하였다. 김성첨은 굶주림과 흑형에 고통 당하는 신자들에게 “천당 진복을 누리려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을 참아 받지 못하겠냐? 감심으로 참아받자” 하고 격려하였다 한다. 이들은 옥중에서도 항상 쉬지 않고 공동으로 기도를 바쳤고 형제적 사랑을 나누며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견디었다.



    백지사터


    성지2

    이곳은 동헌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대원군 집정 때인 1866년 병인박해가 계속 진행되어 대학살이 감행되는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곳이다.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 붙이기를 여러 번 거듭하여 질식사 시키는 방법으로 일면 ‘도모지사(塗貌紙死)’라고도 하며 쇄국 정책의 분노와 증오에 양심과 신앙 자유가 질식한 곳이다.





    백지사형이란『동헌 마당에 나무 말뚝을 박고 교우를 평좌시킨 다음 말뚝에 묶은 후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품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시키는 사형 방법이었다 (일명 도모지사형 (途毛紙死刑) 이라고도 함)

    백지사형은 얼굴에 종이를 여러겹 바르니 죽고 사는 것이 캄캄하다는 뜻의 도모지사형(途毛紙死刑)이라고도 불리는데 현대 표기 도무지도 여기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백지사 터에서는 신도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발라서 질식시키는 백지사(白紙死, 일명 도모지사)형이 집행되었다 전하는 목격담에 의하면 교우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붙이고 또 물을 뿜으니 질식하여 죽는데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죄인을 문초하던 동헌 뜰에는 옛 부사들의 선정비, 불망비(不忘碑)가 서 있고, 대원군이 천주교를 타도하도록 세운/ 척사비(斥邪碑)가 외롭게 서 있다 이 척화비는 길가에 세웠던 것을 누군가가 뽑아 널다란 받침으로 썼고, 다시 마을 4H 클럽 표지판이 되었던 것을 1975년 당시 여산 성당 주임 신부 박창신 신부님께서 발견하여 오늘의 자리로 옮겨놓게 되었다.